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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블뉴스] ‘일상 속의 장애인’ 스토리텔링 공모전 수상작 연재-①

2015.06.17

‘일상 속의 장애인’ 스토리텔링 공모전 수상작 연재-①

최우수상 ‘우리 부부가 살아온 17년’



밀알복지재단이 최근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부정적인 인식을 개선하고자 ‘일상 속의 장애인’이라는 주제로 스토리텔링 공모전을 진행했다.

이번 스토리텔링 공모전은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 ‘장애인 친구로 지내기’ 등 장애 또는 장애인과 관련된 일상 속의 모든 이야기를 대상으로 진행됐다.

공모전에는 총 50편의 작품이 모집됐으며 재단은 2주간 총 3차에 걸쳐 심사를 진행해 최우수상 1명, 우수상 2명, 가작 1명, 총 4명을 선정했다.

에이블뉴스는 수상작을 연재한다. 첫 번째는 최우수상 ‘우리 부부가 살아온 17년’이다.


우리부부가 살아온 17년 / 임혜현

나와 남편은 지금으로부터 17년 전 31살에 만나 결혼을 하여 지금 슬하에 초등학교 2학년인 아들하나를 양육하며 살아가고 있다.

오늘도 나의 하루는 이 아들의 학교 등교를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지금의 이 평화로운 가정이 되기까지 우리에게는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러기에 지금의 이 행복이 너무나 소중하고 감사하기만 하다.

여느 가정이나 한평생 살아가는 과정 속에 희노애락이 있겠지만 우리부부는 그러한 일반적인 일들을 넘어 산 넘어 산,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나와 남편은 지체장애 1급, 3급의 장애를 가지고 있다.

나는 지체 1급, 남편은 3급이기에 서로 보강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 많은 조건 따지지 않고 일생을 함께 하자는 약속을 하고 결혼에 골인을 하였다.

그 당시 우리부부는 함께 장애인근로시설에서 맞벌이를 했다. 우리 둘 다 근로활동을 하였기에 수급권에 의지하지 않고 우리 힘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힘들지만 서로 위로하며 함께할 수 있는 배우자가 옆에 있다는 기쁨으로 잘 견디며 살아왔다.

나는 휠체어를 탔고 남편은 보행이 가능했기에 어디를 가든 늘 함께했다. 주중에는 열심히 일을 하고 주말에는 영화나 나들이를 하면서 활력 넘치는 가정을 일구어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자꾸 몸 이곳저곳이 이유 없이 아프다고 했다. 처음에는 너무 무리해서 돌아다녀서 그러려니 생각을 하고 가볍게 넘어가곤 했는데 밤이면 밤마다 그 빈도와 통증의 강도가 심해서 참을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안되겠다 싶어 대학병원에 진료 예약을 하고 정밀검진을 한 결과 희귀성난치병인 베쳇트라는 일명 희귀성면역력 질환이 있다는 것이다.

이 병의 증상은 우리 몸의 면역력을 일정하게 해 주지 못해서 오는 병으로 몸 이곳저곳에 염증을 일으키는 희귀한 질병이었다.

그때의 천청병력 같은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니 소아마비라는 장애도 모자라 희귀병이라니, 그것도 완치가 불가한 평생을 함께 달고 살아야할 병이라는 소리에 우리 두 사람은 말 그대로 망연자실이었다.

아니 왜 우리에게 이런 시련을... 하늘을 원망하며 절망했지만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 진단이 내려지고 얼마 후부터 정말 남편의 몸은 그 질환으로 인한 온갖 고통이 시작되었다.

한밤중 진통제 없이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고 어느 순간 어지럼증 증상이 시작되면 혈변이 나오기 시작해서 응급실로 가면 장에 출혈이 진행되고 있기에 급하게 처치를 해야만 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온몸에 피부에 트러블과 가려움증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 왔다.

이렇게 여러 가지 병이 올 때 마다 남편은 휴직계를 내야했고 나는 남편의 병수발과 가사일, 직장을 홀로 감당해야했다.

참으로 삶이 버겁고 힘들었지만 우리 두 사람은 암이 아닌 것에 감사하자며 묵묵히 인내하며 살아갔다. 그래도 혼자가 아닌 누군가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남편은 많은 위로를 받는 것 같았다.

병원생활이 끝나면 다시 직장에 복귀해서 함께 맞벌이를 했다. 하지만 그것도 한 두번 너무 자주 그런 일들이 있으니 안되겠다 싶어 남편은 1996년 퇴사를 결정했다.

처음에는 나 역시 한 집안의 가장이 일을 놓는다는 것이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남편은 일을 그만두었지만 나는 계속 직장생활을 하면서 가정을 꾸려나갔다.

남편의 건강이 좋아지면 다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과 기대가 있었기에 나는 일을 그만두지 않고 계속 다녔던 것이다.

하지만 남편의 몸은 쉽사리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었다. 내가 직장을 다녀오면 남편은 그냥 집에서 컴퓨터와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갈등과 불화로 이어지기도 했다.

다행인 것은 그 시절엔 우리에게 아이가 없었다. 아이가 없기에 집안엔 특별히 웃을 일도 없었다. 그저 투병생활을 하는 남편의 모습이 우울한 모드만 자아내게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아 갖는 문제를 놓고 우리 부부는 진지한 대화를 시작했다. 아이라도 있으면 활력이 생길 것 같으니 불임치료를 하자고 했다.

남편은 지금의 현실도 힘든데 아이까지 있으면 더 힘들다며 만류를 했다. 하지만 나는 아이라도 있으면 삶의 의미와 활력이 새로울 것 같아 불임클리닉을 시작했다.

직장생활을 하며 병원을 다닌다는 것은 나에게 또 다른 고달픈 일상의 시작이었다.

일을 하다가도 시간 맞추어 병원에 가서 배란 유도주사를 맞고 집에 와서 쉬지도 못하고 곧바로 직장에 나가 일을 하는 그 시간들의 고달픔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불임치료 위해 병원 다니기를 1년, 많은 노력에도 좋은 소식은 없기에 우리부부는 1년을 끝으로 인위적인 생명잉태의 꿈을 접자는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없으면 없는 대로 우리 둘만 행복하게 살자는 생각으로 자녀에 대한 미련을 접게 되었다.

하지만 늘 허전함과 아쉬움은 남았었던 것 같다. 남편의 아픈 모습만 바라보는 나의 심정이 더욱 힘이 들었기 때문이 아닌가싶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은 우리의 이 안타까운 바람을 외면하지 않으셨다. 나의 몸에 이상증세가 있어 병원에 갔더니 임신이란 것이다.

그때의 그 감격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고도 컸다. 생각지도 않은 자연 임신을 결혼한 지 9년 만에 하게 된 것이다.

우리 부부는 하늘이 그간의 시련을 잘 견디며 살아온 보상을 준거라 생각하며 더욱 열심히 감사하며 살기로 다짐했다. 나는 임신한 상태에서도 계속직장을 다녔다.

출산 한 달 전까지 점점배가 불러오고 활동이 도저히 불가능한 상태까지 악착같이 일을 했다.

왜냐면 그래야만 예쁜 아이를 맞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부풀어 올랐기 때문이다. 한달간 출산준비를 하면서 행복한 미래를 그릴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진통이 시작되었다. 병원에 급히 119로로 실려가 나는 2006년 2월 23일 새벽 2.8kg의 건강한 남자 아이를 출산하였다.

그때의 심정은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는 표현도 모자랄 정도다. 남편은 밤새 퉁퉁 부은 얼굴로 아이와 나를 보러 단숨에 병원에 달려와 기쁨을 표현해 주었다.

우리는 힘들었지만 정말 열심히 살자는 다짐을 또다시 새롭게 하면서 손을 맞잡았다.

그런데 남편은 또 아이가 세상에 나온 지 3개월 만에 병원으로 실려 가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때 당시엔 지금처럼 활동보조라는 제도 같은 것이 없던 시절이었기에 모든 것을 나 혼자서 감당해야 했다. 아이를 누가 봐줄 사람이 없어 동생한테 맡기고 출근을 했고 주말에는 유모차에 아이를 태운상태에서 장콜을 타고 아빠가 입원한 병원을 다니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 모든 상황들을 견디었나 생각해본다. 아마도 아이가 큰 힘이었지 않았나싶다. 이렇게 육아와 직장생활을 근 4-5년 하다가 더 이상은 안되겠다 싶어 나는 2010년 기점으로 직장생활을 마감했다.

왜냐하면 나 혼자서 직장을 다니자니 남편의 병원비가 실로 어마어마했는데 우리수입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직장을 그만두고 수급권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생계비는 그렇다 치더라도 의료비는 큰 해택이 되었기에 우리는 그때부터 수급자가 되어 나라의 해택을 받게 되었다. 지금 우리남편의 상태는 많이 호전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 불치의 질환은 따라다니고 있고 하루 세 번 한주먹의 약으로 병을 다스리며 살아간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아이는 건강하기에 늘 우리부부에게 활력과 웃음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남편은 여러 여가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운명을 긍정적으로 받아드리며 즐겁게 살아가고 있다.

아마도 아이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을 한다. 물론 가끔 약부작용과 온몸에 이상증세가 찾아오면 또 힘들어 하며 고통스러워 할 때도 있지만 우리에게 소중한 가정이 있다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 남편은 감사하며 힘을 얻는 것 같다.

나 역시 지금의 이 삶이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지 모른다. 우리에게 이리한 어려움이 없었으면 물론 더 좋았겠지만 이러한 어려움과 고통의 순간들이 있기에 삶이라고 하는 인생의 깊이와 참맛 뭐 이런 것도 알게 되었고 무엇보다 우리 세 사람이 함께 안락한 보금자리에서 서로 부대끼며 산다는 것이 너무나 소중하다는 사실을 세삼 절절히 느껴지기 때문이다.

앞으로 또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이 몰아닥칠지 알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잘 극복하며 살아 온것처럼 우리 두 사람은 그 시련의 어떤 파도가 닥친다 해도 절망하거나 주저앉지 않고 당당히 맞서서 헤쳐 나갈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가 있고 우리 두 사람도 아직은 젊음이 있기에...

가족이라는 것 결코 한사람으로써는 완성할 수 없는 인생이라고 하는 커다란 파노라마를 오늘도 우리 가족은 조금씩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 함께 산책을 하고 주말에는 나들이와 문화 관람을 한다.

이런 여유와 삶의 기회들이 있을 때 맘껏 하자는 방향성은 우리 부부가 일치를 한다.

물론 우리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힘이 되어준 많은 분들이 계시다. 우리가 그분들의 도움 아니면 오늘 이 자리에도 없을 것이다.

지금은 그분들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 본다. 그 사랑에 보답하기 해서도 오늘에게 주어지 지금의 이 삶에 우리 가족은 끝까지 최선을 다해 달려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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