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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스토리텔링 공모전 가작 - 무제

2018.02.02

조혜진
 
어어-언니~.. 어언니~..
  옆방에서 부른다. 저녁 무렵이면 늘 옆방 수경이는 나를 불렀다. “나.. 저것 좀 내려줘..” 마루를 지나 마루 끝에 붙어 있는 쪽방의 문을 열어보니 안장 다리를 하고는 책장을 손으로 가르키고 있다. 책을 내려달라는 이야기다.
  책을 빼서 내려주고는 “됐나?” 하고 무심한 듯 또한 매섭게 쳐다보며 던져주면 수경이는 나를 바라보며 베시시 웃었다.
  어렸을 때 우리집은 한옥집 단칸방에 사글세로 살았다. 한옥에 마루가 있고 세 칸의 방이 있는 집에 두 칸은 우리가 쓰고, 한칸은 수경이가 살았다. 우리가 그 한옥 집에 이사 온지 1년쯤 지났을까..부산에서 수경이가 이사를 왔다. 수경이는 선천적 뇌성마비 2급 장애 아이였다. 어린 나이의 내가 본 수경이의 첫인상은 말도 어눌했고, 걸음걸이는 늘 불안해서 넘어질 듯 넘어질 듯 하였으며, 웃는다고 하는 것이 꼭 괴물표정 같이 느껴졌다. 나는 내 또래가 이사를 와서 같이 즐겁게 놀고 학교도 다녔으면 했는데, 실망이었다.
  수경이네는 막노동을 하는 아버지, 식당일을 하는 어머니, 어린 남동생이 함께 살았으며, 당시 수경이는 7살 나는 11살이었다. 맞벌이를 하는 수경이네는 어린동생과 수경이가 밤 늦게 까지 지내는 경우가 허다하여 아주머니는 나에게 가끔 용돈과 과자를 사주시면서 수경이를 부탁하셨다. 하기 싫고, 신경 쓰이는 일이었지만 난 용돈과 과자 때문에 거절하지 못하고 수경이와 수경이 동생의 부탁을 들어주고 아주머니가 오실 때까지 그 집에서 놀다 우리 방으로 건너오곤 했다. 수경이를 돌보는 일은 어린 나에게 쉬운일이 아니었다. 걸음걸이가 불안하여 늘 넘어지기가 일쑤였고, 나도 어린 몸으로 데리고 다니기가 버거웠기 때문에 우리는 늘 집안에서 놀았다. 어눌한 말투 때문에 대화가 원활하지 않아서 난 늘 수경이와 있는 시간이 지루하고 짜증스럽기만 했다. 그렇게 서서히 나의 관심에서 수경이가 멀어져가는 시기에 수경이는 홀로 골목을 나갔다 오더니 펑펑 울기 시작하며, ‘골목에’라는 말만 어눌한 말투로 되풀이하였다. 나는 놀라 무슨 일인가 해서 골목을 나가서 알아보니 수경이가 혼자 골목을 나왔는데 다른 아이들이 수경이 한테 ‘다리병신’, ‘바보’라며 놀리고, 돌아가면서 수경이를 밀쳐 넘어뜨렸다고 한다. 그때는 지금처럼 아이들이 장애인식개선교육이나 장애예방교육 등 장애에 대한 교육이 부족했고, 지역 내 주민들의 공동체의식도 부족했던 시절이었기에 흔히 있어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난 그 이야기를 듣고는 울고 있는 수경이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얼마나 수경이가 상처받고 힘들었을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땅따먹기를 하고 있는 골목에 물을 한바가지 퍼 부어 버리고, ‘나쁜 놈들아!’하고 외치고는 집으로 들어왔다.
  그 이후 난 동네 친구들과 함께 놀이를 잘 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수경이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길어졌고, 난 자연스럽게 수경이의 말투, 표정, 마음을 서서히 알게 되면서 수경이의 장애가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그렇게 1년 가까이 수경이와 지냈을까?.. 우리 집이 영구임대아파트에 당첨이 되어 이사를 가면서 수경이와의 짧은 인연은 끝이 나나 했다.
  8년 뒤 난 수경이가 고1이 되어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난 그때 사회복지학과를 진학한 대학생이 되어 있었고, 수경이는 장애가 있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상업계 일반 고동학교를 진학한 상황이었다. 수경이는 뇌성마비 장애로 인해 기억, 학습능력이 부족하였고, 일반 고등학교의 학습 진도를 따라가기 어려워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마침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던 내게 아주머니는 적은 금액이지만 과외를 해달라고 부탁하셨고, 다시금 수경이와의 인연이 시작 되었다. 난 예전에 수경이와 지낸 적이 있고, 사회복지학과 학생으로서 장애인을 이해하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수경이와의 과외수업은 순탄하지 않았다. 수업 중 수경이는 내말을 이해하지 못해 어려워했고, 나또한 수경이가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서 설명해야 했기에 수업을 진행하기 어려웠다. 진행하는 내내 수경이에게 난 ‘좀 전에 가르쳐준 건데 이것도 이해 못해?’, ‘내가 방금 기억하라고 했잖아!’ 하며 짜증을 내는 횟수가 점점 늘어갔다. 그러면서 난 과외를 대충 대충 시간만 때우기 시작했다. ‘어차피 가르쳐줘도 기억도 못하는데, 뭐 하러 열심히 가르쳐줘.,.’라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렇게 1년 가까이 과외를 하였고, 난 학업과 다른 아르바이트로 인해 과외를 그만 두게 되었다.
  수경이를 다시 만난건 장애인복지 현장에서였다. 난 장애인복지 분야의 사회복지사로 근무하고 있었고, 수경이는 자립생활센터 동료상담가로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오랜만에 만나는 수경이는 한껏 웃는 모습으로 나를 맞이했고, 나도 성인이 된 수경이가 대견스럽고 반가웠다. 어떻게 지내왔는지 서로 근황을 묻던 가운데 수경이는 나에게 ‘나.. 언니 때문에 사회복지학과 갔어..’라고 한다. 이야기인 즉은 당시 과외를 하던 시기에 자신이 장애가 있는데도 과외를 해주는 내가 너무 고마웠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장애가 있지만 장애인을 잘 이해해주고 돌봐주는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어 전문대학 장애인 특례로 사회복지학과를 진학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차피 가르쳐줘도 기억도 못할 것이라며 무시하며 시간을 보냈던 내 자신에게 너무나 부끄러웠다. 미안한 마음 반 이렇게 잘 커준 수경이가 대견하고 고마운 마음 반을 가진 채 사회복지사 선배로서 수경이에게 도움이 필요할 땐 언제든 전화하라고 명함을 쥐어 주고는 헤어졌다. 이후 현장에서 종종 수경이를 만났으며, 수경이 엄마로부터 수경이의 소식을 듣는다. 이젠 홀로 자취를 하며 지내며, 인권단체에서 장애인식개선교육, 캠페인 등 지역사회에 장애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확산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회복지사가 일하고 있다. 또한 연애도 하며 여행도 다니는 독립생활, 자립생활을 이루어 낸 멋진 여성이 되어 있다.
  나는 장애인복지 사회복지사로 14년을 근무하였다. 3번의 이직이 있었지만 장애인복지는 왠지 나와 잘 맞는 것 같았으며, 일이 즐거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난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시작부터 거의 없었다. 물론 편견이라는 것이 잘못된 지식과 정보로 인해 발생하기도 하지만 편견은 마음 깊은 곳에서 장애인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는가가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가지게 되는 주 원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수경이와 지냈던 시간을 보내면서 어쩌면 자라나면서 자연스럽게 장애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자리잡게 되었던 것 같다.
  장애가 우리의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보여지며 사회 속에서 장애인을 많이 겪는 것만이 자연스러운 장애인식개선이 아닐까 싶다. 지금 그녀는 나와 함께 장애인복지 현장 속에서 같은 목적과 목표를 가지고 나아가고 있다. 장애인 당사자로써 장애인식개선을 위해 발로 뛰고, 장애인의 인권향상을 위해 열심히 목소리를 높이는 당당한 그녀를 난 항상 응원하며, 그녀가 내 인생의 또 한명의 멘토가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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