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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스토리텔링 공모전 가작 - 마음을 전하는 백가지 방법

2018.02.06

마음을 전하는 백 가지 방법
박서진
 
저녁 먹은 뒷정리가 끝나면 나는 어김없이 휴대전화를 집어 든다. 그리고는 11개로 구성된 전화번호를 일일이 터치해 전화를 건다. 통화 연결음이 목청을 가다듬기도 전에 서둘러 전화를 받는 이는, 다름 아닌 나의 엄마다. 일과가 되어버린 딸의 전화를 기다리며, 엄마는 앞치마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전화를 찾아 온 집안을 헤집고 다녔을지도 모르겠다. 수도꼭지의 물줄기를 최대한 가늘게 틀어놓고 설거지를 하고, 휴대전화의 화면과 벽시계를 번갈아 쳐다보며 시간을 가늠했을 것이다.
 
“저녁은 뭐 드셨어요?”
“아침저녁으로 쌀쌀하다. 거기도 그러니?”
“엄마, 저녁은? 저녁 뭐 드셨어요?”
“아버지는 아까 학교 내려가셨다.”
“저녁에 된장찌개 끓여먹었는데 그냥 그랬어요. 엄마가 끓여준 된장찌개 먹고 싶다.”
“오늘 마트에 사람들이 그렇게 많을 수가 없더라.”
“우리 엄만 저녁으로 뭘 드셨을까...?”
“접때 사 둔 자반 한 손이 있어서 저녁에 그거 지져 먹었다. 너는, 저녁은 먹었어?”
 
나의 질문과는 별개로 엄마는 엄마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다만 기다림이 필요할 뿐이다. 가만히 엄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보면 어느 새 나의 질문에 부합하는 대답도 들을 수 있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서 질문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대답은 아니다. 꽤 높은 확률의 우연일 뿐. 허나 서로의 마음을 전달하는 데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엄마는 청각장애인이다. 어린 시절 홍역을 앓은 후 찾아온 중이염이 원인이었는데, 어렵사리 받은 두 차례의 수술에도 증상은 호전되지 않았다. 그나마 제 기능을 해주던 왼쪽 귀에 의지해 살았지만, 그마저도 시간이 지날수록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엄마의 사정을 알게 된 것은 갓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즈음이었다. 너르지도 않은 단칸방에 다섯 식구가 세 들어 살던 때였다. 하루는 밤중에 연탄가스가 새어 식구대로 사경을 헤매었다. 꿈에서 깨어도 꿈속 같은 몽롱한 기운에 휩싸인 채 얼핏 눈을 떠 보니, 마당 한편에 널브러져 있는 언니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엄마를 찾았다. 관자놀이에 핏대가 서도록, 온 힘을 다해 엄마를 불렀지만 마음과는 달리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소리 내 엉엉 울고 싶었으나 눈물이 마치 고체처럼 단단히 목구멍을 막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저만치서 엄마를 부르는 아빠의 거칠고 갈라진 목소리가 들렸다. 나와 언니에 이어 오빠까지 차례로 들쳐 업고 나오느라 힘이 빠진 아빠는 깃발처럼 휘청거리며 다시 집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아빠는 엄마를 업고 나왔고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때마침 기척에 깬 이웃들의 도움으로 엄마는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산처럼 거대한 아빠가 통곡하였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엄마는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엄마는 할 수 있는 한 최후의 순간까지 숨기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것이 엄마의 마음에 새겨 질 상처 때문이 아니라 자식들 마음에 새겨 상처를 염려했기 때문이란 걸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다. 밤마다 부엌에 쪼그리고 앉아 진물이 나는 귀를 솜뭉치로 틀어막으며 지키고자 했던 비밀은 결국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 어린 나완 달리 제법 철이 들었던 언니와 오빠는 일찌감치 엄마의 비밀을 짐작하고 있었다. 허나, 엄마의 마음까지도 짐작했기에 짐짓 모른 척 했던 것이다. 몇 년 전, 명절을 맞아 가족들이 모두 모였을 때 언니를 통해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연탄가스 사고 이후, 나는 종종 까닭도 없이 엄마를 부르곤 했다. 열에 아홉 번을, 어쩌면 열 번이었을지도 모르는, 나는 엄마의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다. 엄마는 그저 묵묵히 재봉틀 앞에 앉아 한복 바느질에 열중할 따름이었다. 나는 모든 것을 시끄럽게 덜덜거리는 재봉틀 탓이라도 되는 것처럼 방바닥에 놓인 옷감을 풀어버리거나 바구니에 모아 둔 헝겊들을 흐트러뜨리며 뿔난 망아지마냥 굴었다. 그러다가 제 풀에 꺾여 골목으로 나가 친구들과 어울려 놀곤 했다.
 
학창시절 동안 딱 한 번 엄마가 학교에 온 적이 있었다. 연탄가스 사고 후 몇 달 만에 학예회 발표가 있던 날이었다. 교실 뒷문이 열릴 때마다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엄마를 발견한 아이들이 흥분에 못 이겨 “엄마!”하고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나는 한편으로는 불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기다려지는 마음도 그에 못지않았다. 교실 뒤편에 빼곡히 엄마들이 들어찼을 때 즈음 살며시 뒷문이 열리며 엄마가 나타났다.
 
“엄마!”
 
열에 아홉 번, 어쩌면 열에 열 번이었을지도 모르는, 엄마는 대답이 없었다. 반가운 마음이 앞서 엄마를 불렀지만 동시에 나는 당황하였다. 반 친구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엄마의 비밀이 밝혀지는 것이 두렵기도 했다. 그런데 그 때, 기적처럼 엄마를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웃어 보였다. 믿을 수가 없었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그날 엄마는 다른 학부모들과도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눴고, 담임 선생님과도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학예회를 마치고 엄마의 손을 잡고 집으로 오는 길에도 엄마는 지나가는 친구들의 인사에 일일이 눈을 맞추며 인사를 해 주었다.
 
그날의 비밀을 나는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다. 연탄가스 사고 이후 아빠는 석 달 치 월급에 가까운 돈으로 엄마의 보청기를 구입했다. 엄마는 난생 처음 갖게 된 보청기를 아끼느라 평소에는 모셔두기만 하다가 나의 학예회 날 착용했던 것이다. 비록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는 반쪽짜리 보청기였지만 엄마에겐 더 없이 넓은 세상으로의 길잡이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엄마는 보청기를 딱 한 번 밖에 착용하지 못했다. 아끼느라 서랍 속에 모셔둔 것이 오히려 화근이 된 것이다. 정기적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고장이 난다는 것을 엄마는 몰랐다고 했다. 그날 이후 다시는 엄마가 학교에 오는 일이 없었다.
 
보청기라는 것의 용도를 알게 된 후 나는 장차 돈을 벌게 된다면 반드시 엄마에게 최고의 보청기를 선물하겠노라 다짐하곤 했다. 엄마는 시장에서 물건을 구입하더라도 흥정하는 법이 없었다. 노래를 부르지도 않았다. 고요 속에서 고된 줄을 모르고 재봉틀 폐달을 밟았다.
 
어린 시절의 바람대로 나는 첫 월급을 받아 언니, 오빠와 함께 엄마의 보청기를 구입했다. 그날 이후 엄마는 세상과 좀 더 친해지셨다. 노래교실에서 노래도 부르신다. 언니, 오빠, 나에게 돌아가며 전화 거는 일도 즐거운 일과가 되셨다. 반쯤 열린 소리의 문만으로도 엄마는 세상의 아름다운 소리를 들으신다. 그것은 소리가 귀가 아니라 마음으로 스민 까닭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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