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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스토리텔링 공모전 최우수상 '장애인의 누나'로서 '나'의 삶

2018.02.12

‘장애인의 누나’로서 ‘나’의 삶
고은주
 
“은주야, 나는 네가 창환이의 누나가 아니라 너 자신으로서의 삶을 살아갔으면 좋겠어.”
 
어머니께서 내 손을 붙잡고 나에게 해주셨던 말이었다.
 
나의 동생은 자폐 1급을 앓고 있는 장애인이다. 내가 태어난 후, 1년 뒤에 바로 동생이 태어난 탓에 나는 어렸을 적부터 조부모님의 손에 길러졌다. 얼핏 생각나는 어릴 적 기억 속에서, 동생은 어머니를 괴롭히던 작은 악마였다. 욕조 물에 똥을 싸고, 딱풀을 먹기도 했으며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면 자신의 머리를 주먹으로 때리며 온 집안이 떠나가라 울어버렸다. 덕분에 어머니의 눈에서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고, 너무 어렸던 나는 그런 어머니의 애처로운 뒷모습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께서는 동생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자전거 타는 것도 무서워하시던 어머니께서는 한 달 만에 운전면허를 취득하셨고, 차로 하루에 네다섯 개의 치료 센터를 오가며 동생의 교육에 힘쓰셨다. 또 수업이 없는 주말에는 동생과 함께 꼭 밖으로 나가 동생에게 사회적인 경험을 시켜주려 노력하셨고, 장애인이라며 무시 받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사회적 도덕과 예절도 철저히 가르치셨다. 내가 가장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점은, 어머니께서는 누구보다도 밝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진 강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수 년 동안 어머니의 간절함에 보답이라도 하듯 동생은 누구보다도 밝고 순한 아이로 성장하였고, 모든 특수 선생님들께서 입을 모아 칭찬하는 우등생이 되었다.
 
동생과 함께 지내면서, 나는 유년 시절부터 장애인들을 접하고 그들과 함께 생활하는 환경에 자연스럽게 익숙해졌다. 세상에 처음 발을 내딛은, 새하얗고 순수한 첫 눈 같은 그들의 미소를 보며 나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 미소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어렴풋이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깨끗한 눈이 누군가에게 가장 먼저 밟히듯이, 그 아이들에게 세상은 너무나 모질고 냉정했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일이었다. 나는 평소와 같이 점심을 먹고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 때 다른 반이었던 친구 한 명이 내게 달려와 빨리 운동장으로 내려가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모래가 날리던 운동장 구석에서, 내 동생은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었고 그 옆에서는 옆 반 남자아이들이 신이 난다는 듯 낄낄대며 그네를 타고 있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네를 타고 있던 내 동생을, 옆 반 아이들이 반항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밀치고 조롱하며 동생의 그네를 빼앗아 탔다는 것이었다. 동생과 달리 얌전하지만은 못했던 나는 남자 아이들과 모래바닥을 구르며 싸움을 하기 시작했고, 친구의 이야기를 들은 도움반 선생님께서 달려오시며 싸움은 종결되었지만 아직도 나는 그 아이들에게서 동생에 대한 사과를 받아내지 못한 점이 후회가 되어 마음속에 남아있다.
 
가장 마음에 상처를 받았던 일은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었다. 그 당시 나는 종합 학원에 다니고 있었는데, 친구들과의 관계도 완만하고 성적도 나쁘지 않았던, 어른들에게는 모범생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그런 아이였다. 그 학원에는 초등학교를 함께 나왔던 한 남자아이가 있었는데, 좋은 성적을 받았던 내가 질투가 났었는지 친구들과 즐겁게 웃고 있는 내게 다가와 “네 동생이 장애인인거 다 말해버리기 전에 내 말 잘 들어.”라고 귀에 속삭였다. 그 뒤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는 너무 화가 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 남자아이에게 온갖 욕을 쏟아 부었던 것 같다. 나중이 돼서야 그 아이에게 사과를 받기는 했지만 어릴 적 나에게는 꽤나 충격적이었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한 번도 장애가 다른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일반 사람들이 감기에 걸리는 것처럼, 장애인들도 그저 오랫동안 낫지 않을 감기를 앓는 것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해왔다. 그래서 주변 친구들에게 동생이 자폐를 앓고 있다는 것을 숨기려하지 않았고, 학교가 끝나면 동생의 손을 붙잡고 함께 하교를 했었다. 하지만 나처럼 장애를 경험해보지 못한 다른 아이들은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장애 아이들이 다른 친구들에게 이유 없이 무시당하고 조롱당하는 것이 싫었다. 장애를 가졌다고 해서 동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 자신이 정해놓은 틀 안에서 누구보다도 바르게 살아가는 내 동생이 바르지 못한 세상에게 상처받는 모습이 끔찍이도 보기 싫었다. 그래서 나는 특수교사가 되기를 마음먹었다. 특수교사가 되어서 내 동생과 같은 아이들도 훌륭하게 사회생활을 할 수 있고,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아이들이 문제행동을 보이는 것은 그것이 그들만의 의사표현임을, 평생 도움을 받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특목고 준비를 포기하고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해 특수교사의 꿈을 키워갔다.
 
어느 날 저녁, 어머니와 간단히 차를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 때였다. 어머니께선 문득 우리 가족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셨다. 나는 만일 부모님이 돌아가시게 된다면 시설에 보내지 않고 동생과 함께 살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결혼을 하게 되더라도 배우자 쪽에서 동생을 부양하는 것을 반대한다면 나는 기꺼이 혼자 살 각오가 되어 있다고, 절대 동생을 시설에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어머니께서는 나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으시더니 내 손을 잡으며 담담하게 이야기하셨다.
 
“은주야, 나는 네가 창환이에게 가지고 있는 책임감을 조금만 내려놓아도 좋을 것 같아. 너는 창환이의 누나이기도 하지만 그 전에 은주 너잖아. 그러니까 하고 싶은 것 하고 즐길 것은 즐기면서 너만의 삶을 살아, 창환이를 위한 삶 말고.”
 
‘나’로서의 삶은 무엇일까? 아마 장애인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가족들에게 이 문제는 영원한 고민거리로 남을 것이다. 만일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동생과 나만 남는다면, 어머니의 말처럼 나는 나의 인생을 살아가야 할까? 그 전에 나의 인생은 무엇일까? 동생을 부양해야 할까 아니면 시설에 맡겨야 할까? 아니 내가 동생을 시설에 맡길 수 있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올해 20살이 된 나는 그토록 꿈꿔왔던 특수교육과에 당당히 입학했다. 지금 나는 어머님들에게 ‘선생님’이라는, 아직은 어색한 호칭을 들으며 장애 학생들에게 사회적인 경험과 예절 등을 가르치는 중이다. 우리 어머님께서 내 동생에게 그랬던 것처럼. 사실 아직 ‘나로서의 삶’에 대해 정의를 내리지 못했다. 확실한 것은 나는 이 일을 하며 보람을 느끼고, 내가 동생에게 부끄럽지 않게 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욕조 물에 똥을 싸던 그 어린 소년은 다음 주 금요일, 누나의 손을 잡고 당당히 전공과 시험을 응시하러 간다. 만일 전공과 시험에 합격을 한다면, 내 동생은 사회로 나갈 수 있는 문을 열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동생을 끝까지 부양하겠다는 내 마음에는 아직 변화가 없다. 사실 나는 알고 있는 줄도 모른다. 나는 절대 동생을 시설에 맞기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하지만 나를 위한 삶을 즐기지 못했노라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지금의 나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충분히 행복하니까.
 
누구보다 잘생기고 멋진 고창환! 부끄러운 마음에 너에게 말하지는 못했지만 누나 동생으로 태어나줘서 정말로 고마워. 누구보다 착하게 살아온 너니까 앞으로 꽃길만 걸으면서 행복하게 살아가자 우리. 다음 주에 있을 전공과 시험 평소처럼 멋지게 보고 나와. 누나가 네가 좋아하는 월드콘이랑 치토스 잔뜩 사줄게! 사랑해 고창환. 내일도 예쁘게 웃자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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