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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스토리텔링 공모전, 450명이 빚어낸 ‘일상 속의 장애인’ 이야기

2024.10.10

제10회 스토리텔링 공모전 시상식


제10회 스토리텔링 공모전 ‘일상 속의 장애인’ 

장애인식개선 캠페인 일환으로 시작된 밀알복지재단 스토리텔링 공모전이 어느덧 제10회를 맞이했습니다. 작년에 이어 한국장애인고용공단과 공동 주최로 일상부문 및 고용부문을 모집하여 일상과 직장에서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없앨 수 있는 작품을 모집했습니다.

지난 6월 3일부터 7월 14일까지 진행된 공모전을 통해 450편의 수필이 모집되었고, 밀알복지재단 및 후원기관(고용노동부, 보건복지부, 국민일보, 에이블뉴스,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의 공정한 심사를 통해 총 29편의 수상작이 선정되었습니다. 일상부문은 18명(대상1, 최우수상3, 우수상5, 장려상9), 고용부문은 11명(대상1, 최우수상1, 우수상4, 장려상5)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습니다.


제10회 스토리텔링 공모전 포스터


스토리텔링 공모전 시상식 현장


밀알복지재단 정형석 상임대표


지난 9월 24일, 밀알복지재단 별관 밀알홀에서 제10회 스토리텔링 공모전 시상식이 개최되었습니다. 시상식에는 밀알복지재단 정형석 상임대표, 한국장애인고용공단 김환궁 기획관리이사를 비롯해 수상자 17명과 수상자의 가족, 지인들이 함께 참여했습니다. 시상식은 밀알복지재단 정형석 상임대표의 축사로 시작해 수상자 상장 전달식, 수상 소감 순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상장 전달식에는 일상부문 10명, 고용부문 7명의 수상자가 참석해 꽃다발과 함께 상장을 전달 받았습니다.


일상부문 수상, ‘세상에 당당히 설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전합니다’


일상부문 대상(보건복지부 장관상) 수상자 이관형


일상부문 대상(보건복지부 장관상)을 수상한 이관형 씨의 ‘20년 동안 조현병이라는 악기를 연주 중입니다’는 조현병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두려워하는 것에서 벗어나 장애인식개선 강사로 활동하게 되기까지의 과정과 그 안에서의 성찰을 담은 작품입니다. 이관형 씨는 ‘조현’이라는 단어가 현을 조율한다는 뜻임을 언급하며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생은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줄 수 있는 귀한 악기라’고 전했습니다. 이처럼 감동적인 스토리로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전한 이관형 씨는 일상부문 대상이라는 영광을 거머쥐었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주에 자신이 없던 제 곁에는 저를 사랑해주는

소중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저의 삐그덕 거리고 음이 맞지 않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응원해주고 박수쳐주었습니다. 그때의 용기와 자신감이 오늘 세상에 나와

많은 사람 앞에 설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 

- 일상부문 대상(보건복지부 장관상) 이관형 -


 

일상부문 최우수상 김정호(대리인), 이제욱, 최조은


일상부문 최우수상은 김정호, 이제욱, 최조은 씨가 수상했습니다. 김정호 씨의 ‘조금 느리지만 같이 걸어갑니다’는 5년간 연애한 여자친구가 결국 걷지 못하게 되는 병에 걸렸음을 알게 되었음에도 평생을 약속하고 아름다운 가정을 이룬 스토리를 작품에 담았습니다. 이제욱 씨의 ‘나는 물과 함께 간다’는 청각장애로 인해 물리치료사 공부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노력해 수중치료사라는 새로운 길을 개척한 이야기입니다. 최조은 씨의 ‘우리의 공주 이야기’는 정신장애인 어머니 아래서 자라며 겪은 갈등과 어려움, 그럼에도 느끼게 된 어머니의 크나큰 사랑을 다룬 작품입니다.


이 외에도 일상부문 우수상 수상자 김수아(대리인), 박경영 씨가 참석하였으며, 장려상 수상자 김미경, 김희영, 송다혜, 최지우 씨가 참석해 상장을 전달받았습니다.


고용부문 수상, ‘장애와 고용’이라는 단어 조합이 당연한 사회가 될 때까지



고용부문 대상 김보현, 최우수상 정민권 


고용부문 대상(고용노동부 장관상)을 수상한 김보현 씨의 ‘일하기 싫었었어요’는 치과의사로 일하던 중 불의의 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되어 ‘휠체어 타는 치과의사’로서 장애인근로자의 현실과 장애인식 개선의 필요성을 담아낸 작품입니다. 특히 김보현 씨는 실력은 동일하나 단지 휠체어를 탔다는 이유로 환자들의 시선이 바뀌는 것을 보며 장애인식개선에 힘쓰기로 마음먹었다고 전했습니다. 이처럼 전문 강사이자 장애인 당사자로서 살아가고 있는 김보현 씨는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장애인 고용’의 현실과 사회가 앞으로 개선해야 할 지점을 일깨워주었습니다.


“ 수상작은 저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풀어내 쉽게 쓰여졌습니다.

그러나 글에 담긴 경험들과 생각들은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장애와 고용, 장애와 직업, 장애와 사회, 이러한 단어들의 조합이 쉽게 다가올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그러한 사회가 되기 위해 제 글이 많은 곳에 쉽게 쓰이길 바랍니다. ” 

- 고용부문 대상(고용노동부 장관상) 김보현 -


고용부문 최우수상은 정민권 씨의 ‘나는 아픈 사람이 아니라서’가 수상했습니다. 대학에서 체육학을 전공하던 정민권 씨는 다이빙 사고로 사지마비라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 후 재활과 자격증 취득을 통해 애니메이션 제작, 디자인 강사를 거쳐 사회복지사로서 장애인식 개선에 힘쓰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더 나은 사회에 기여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감당하며 살아오는 그의 삶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안겨주었습니다.


이 외에도 고용부문 우수상 수상자 박기용, 변재영, 이숙희 씨가 참석하였으며, 장려상 수상자 이윤, 조준화 씨가 참석해 상장을 전달받았습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완전한 동행이 이루어지는 세상

스토리텔링 공모전은 장애인과 가족,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앞으로도 감동과 웃음이 가득한 이야기들을 통해 일상 속에 살아가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나란히 함께 걸어가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내년에도 진행될 스토리텔링 공모전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글: 홍보실 유종화

사진: 홍보실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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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스토리텔링 공모전 일상부문 대상

이관형 「20년 동안 조현병이라는 악기를 연주 중입니다」


 조현병은 “현악기의 현을 조율하여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조현병 환자들의 뇌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을 약물로 잘 조율하면,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가능하기에 지어진 이름이다. 악기든 사람의 인생이든 건강하게 조율되려면 누군가에게 들려줘야 한다. 그래야 틀린 소리를 내는지,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조현병 환자다. 20년 동안 조현병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처음엔 병을 고백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랬던 내가 이제는 당당하게 병을 밝히고 있다. 용기를 내기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나를 소중히 대해 주었던 많은 사람들이 있기에 가능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폭력과 학교 폭력에 시달렸다. 명문대에 가고 좋은 직장을 얻어서 성공하는 길이 복수라고 생각했다. 고3때는 머리를 삭발하고 잠도 자지 않았다. 불면증과 우울증을 겪었지만 이를 참고 공부했다. 친구는 물론 사람과 대화도 하지 않으며 대학에 합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불면증과 우울증은 오히려 더 심해졌다. 결국 대형 병원에서 조현병 진단을 받았다. 사람과 말을 하지 않다보니, 대인관계도 사회생활도 엉망일 수밖에 없었다.


 같이 밥 먹을 사람이 필요해서 기독교 동아리에 가입했다. 동아리는 독특한 훈련과 프로그램으로 유명했다. 매주 성경을 공부하고 토요일마다 동아리 사람들 앞에서 느낀 점을 발표해야 했다. 사실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며 반성하는 고해성사와 비슷했다. 처음엔 걱정과 두려움이 앞섰다. “내 이야기를 듣고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쩌지?” 하고 말이다.


 나에게도 발표의 시간이 찾아왔다. 고개를  푹 숙이고 써 내려간 원고를 읽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의 아픔과 상처, 그로 인해 겪고 있는 병의 증상과 고통까지 두렵고 떨리는 목소리로 읽었다. 그리곤 자리로 돌아오는데, 한 선배가 미소를 지으며 “관형아! 잘했어. 너무 멋있었어!”라고 말해주었다. 날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불쌍하게 생각할 줄 알았는데, 이외의 반응이었다. 나중에 선배들의 발표를 듣고서야 깨달았다. 누구에게나 인생에 아픔이 있고 고통이 있지만, 그것을 나누다보면 회복이 되고, 누군가에게 웃으면서 위로와 공감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대학교 수업시간에도 같은 경험을 했다. 나는 언론학을 전공해서, ‘스피치 발표 실습’이라는 수업을 들어야 했다. 교수님은 첫 시간부터 학생들에게 앞에 나와 자기소개를 5분간 하라고 시켰다. 나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첫 발표를 망치고 말았다. 같이 수업을 듣는 동기들이 위로해 줄 정도였다. 그 다음 주 수업에는 교수님이 10분간 자기소개를 하라고 시켰다. 이번에도 고개를 푹 숙이고 떨리는 마음에 눈을 감았다. 다만, 동아리 때 발표를 했던 경험을 살려 내 인생의 아픔과 상처, 조현병을 가진 사실까지도 가감 없이 이야기했다.


 발표를 마치자 적막이 흘렀다. 조심스레 눈을 떠서 교실에 앉아있는 교수님과 학생들을 쳐다봤다. 모두가 말없이 날 바라봤다. 그리고 앞에 앉은 한 학생이 박수를 쳤다. 이내 교실 안에 있는 교수님과 모든 학생들이 날 향해 박수를 쳐 주었다. 그때 깨달았다.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방법은 말하는 기술이나 발음, 목소리가 아닌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진정성이라는 사실을. 그때부터 매주 스피치 실습 시간이 기다려졌다. 말하는 것에 자신감이 붙었기 때문이다. 비록 정신과 약의 영향으로 침이 잘 안 나와 발음은 어눌했지만,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었다.


 졸업 후 어느덧 시간이 흘렀다. 계속되는 직장생활 실패로 나이만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한국장애인개발원의 장애인식개선 강사 양성과정을 알게 되어 지원했다. 처음엔 내가 사람들 앞에 서서 말하는 직업이 적성에 맞을지 고민됐다. 게다가 조현병 당사자로서 사람들에게 장애인식개선 강의를 하는 게 과연 설득력이 있을지도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대학 후배의 말 한마디가 큰 도움이 되었다. 


“형은 사람들 앞에 서는 것 자체가 콘텐츠에요.”


 이 말에 용기를 얻어 장애인식개선 강사 양성과정에 도전했다. 서류와 면접에 붙고 양성 과정에 임했다. 그 안에서도 정신장애 유형의 당사자는 나 하나였다. 신체장애 유형의 다른 강사 후보생들은 처음엔 나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이 있었다. 하지만 함께 강의 듣고 밥을 먹고 삶을 나누다 보니, 조현병 환자도 다르지 않다는 걸 전할 수 있었다. 어느덧 양성 과정을 마친 뒤, 영상 테스트를 받았다. 그때 하고 싶은 말들을 마음껏 내뱉었다.


“조현병 환자들은 폭력과 폭언으로 받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상처가 트라우마가 되고, 그 트라우마가 병이 되었습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아픈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우리가 괴물인지? 우리에게 아픈 상처를 준 나쁜 사람들이 괴물인지? 아니면 아프게 살아가는 우리를 괴물로 보이게 만들고 차별하는 언론과 사회가 진짜 괴물인지?”


이어서 나는 동아리에서 했던 발표처럼, 대학교 스피치 수업 때 했던 발표처럼, 내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우리는 직접 겪어보지는 알 수 없는 고통의 시간들을 보내왔습니다. 때로는 너무 힘들어서 생명조차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살아 숨 쉬는 건, 그 고통을 잘 이겨내 왔다는 증거입니다. 결코, 의지나 정신력이 약해서 병을 겪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보다 강인하고 슬기롭게 이 병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제게 조현병은 장벽이 아니라, 장벽을 넘게 해주는 발판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나는 영상 테스트에 합격하고 장애인식개선 강사로서 출발할 수 있었다. 물론 조현병 당사자로서 강의를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한번은 강의를 시작도 전에 어떤 여성분이 내 눈을 피하며 다가왔다. 나는 “왜 제 눈을 피하세요?”라고 물어보자, 그 여성은 “조현병 환자와 눈을 마주치면 공격을 당할 수 있다고 들어서요.”라고 대답했다. 그만큼 이 사회는 정신장애인들을 향한 차별과 편견이 굉장히 심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주려 노력하고 있다. 다른 신체장애 유형처럼, 정신장애 유형의 당사자들도 자신의 이야기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뉴스 속 일부 범죄자들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며 선하게 살아가는 정신장애인들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또 사회에서 부당한 현실과 차별에 목소리를 내는 용감한 당사자도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정신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조금 다를 수 있지만, 우리에게도 이루고 싶은 인생의 목표가 있고, 사랑하며 살아가고 싶은 똑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릴 것이다.


 나는 지금도 여러 강연 무대 뿐 아니라, 글을 쓰고 방송 프로그램에도 출연하며 내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겪었던 인생의 아픔과 상처, 정신질환으로 인한 고통과 회복의 과정까지. 대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20년 동안 조현병과 함께 살아온 나의 인생을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고 있다. 


 대학시절, 한 은사님이 내게 해주신 조언이 있다.


“세상에 나의 모든 상처와 아픔을 듣고도, 나를 이해해주고 위로해주고 공감해주는 사람이 3명이상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 할 수 있단다.”


 당시 내게 그런 사람이 몇 명이나 있는지 세어 봤었는데, 10명이나 되었다. 동아리 선후배들, 학교 친구들, 교수님들에 이르기까지.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는 소중한 사람들을 통해 조현병에서 회복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강연을 통해 나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나는 이 순간도 삶의 연주를 통해 더욱 건강하게 조율될 것이며, 앞으로도 행복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제10회 스토리텔링 공모전 고용부문 대상

김보현 「일하기 싫었었어요」


#비장애인으로 살아온 30년

 치열하게 공부하고, 일하며 살아온 30년이었습니다. 치과의사 그리고 전문의가 되기까지 치열하게 공부하고 일했습니다. 대학병원에서 인턴 및 레지던트로 근무할 때는 일이 너무 많았습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그래서 때로는 “일이 하기 싫었었습니다.” 그 당시 저에게 일이란 해야만 하는 의무, 그리고 의사로서 실력을 쌓기 위한 수단의 의미도 컸던 것 같습니다. 환자 분들에게 최선을 다하고 잘 치료해드리면서 보람과 성취를 느낄 수 있었지만, 진료 외에 주어진 많은 업무들에 치였던 나날들이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의사에서 환자가 되다.

 저는 후천적으로 장애를 갖게 되었습니다. 의사로서 토요일 진료를 마치고 친구들과 강원도 양양에 서핑을 갔다가 불의의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었습니다. 같은 병원 응급실에 하루 뒤인 일요일에 환자로 돌아왔습니다. 하루아침에 의사에서 환자로 근무하던 병원에 돌아왔습니다. 처음에는 현실 감각이 없어서 괜찮았지만, 저의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지옥 같은 날들이 연속되었습니다. 매일 죽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었고, 우울증 약도 달고 살았습니다. 그 당시 저의 상실감 중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일이었습니다. 

   “내가 다시 치과의사로서 일을 할 수 있을까?” 


#다시 일터로 복귀하다. “일하고 싶어요!”

 “여보세요?” “안녕하세요.”oo병원 교육수련팀 ooo입니다.”

제가 병원에 입원하여 우울한 날들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한 통의 전화가 왔습니다.

레지던트 수련 과정 중에 장애를 갖게 되어 휴직을 하였는데 이 휴직이 1년 이상 지속되면 레지던트를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 수련 규정에 대해 안내해주는 전화였습니다. 이때부터 저는 일이라는 것에 대해 현실적으로 고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당시 제 상태는 1시간만 휠체어에 앉아있어도 기립성 저혈압으로 어지럽던 때였기 때문에 휠체어에 앉아서 치과 진료를 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컸고, 다른 일을 찾아볼까하는 고민도 해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전화를 받고 내가 복직해서 다시 일을 하지 않으면 이 직업을 갖기 위해 평생을 치열하게 공부하고 달려온 나의 인생이 송두리째 없어지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비장애인일 때 격무에 시달리며 때로는 하기 싫었던 그 일이 이제는 정말 지금까지의 제 삶 전체를 걸고 다시 하고 싶은 절실한 일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7개월가량의 짧은 병원 생활을 뒤로 하고 레지던트로 일터에 복귀하였습니다.

    “정말 격하게 다시 일하고 싶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다.

 병원에 돌아와 저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휠체어에 오래 앉아서 진료할 수 있도록 훈련을 하였고, 진료하는데 맞는 휠체어도 맞췄습니다. 본과 3학년 때 처음으로 임상 실습을 시작할 때 했던 스케일링부터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나 자신도 내가 다시 진료할 수 있을지 몰랐으니, 병원의 교수님 및 동료들은 더 걱정이 됐을 것 같습니다. 감사하게도 그분들은 저에게 다시 기회를 주었고, 신뢰를 주었습니다. 그러한 신뢰를 기반으로 저는 다시 치과의사로서 진료를 할 수 있게 되었고, 비장애인 치과의사일 때와 동일하게 진료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니 더 잘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의무로만 느껴지던 일이 저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하고 제 자신이 사회구성원으로서 바로 설 수 있는 그런 사명이 되었습니다. 그 사명감으로 환자 분들을 더 이해할 수 있었고, 저 자신도 즐겁게 그리고 절실하게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좋아”


#장애인에게 있어 직업의 의미

 장애인에게 직업이란 돈을 버는 수단을 넘어 자아실현의 목적도 있습니다. 비장애인들에게도 직업은 동일한 의미를 갖겠지만, 제가 느낀 바로는 장애인이 되었을 때 더 강하게 이러한 의미를 느꼈습니다. 장애인고용촉진 및 직업재활법에서는 장애인을 “신체 또는 정신상의 장애로 장기간에 걸쳐 직업생활에 상당한 제약을 받는 자”라고 정의합니다. 이러한 법적 정의에서도 볼 수 있듯 장애인은 상당한 제약을 받습니다. 특히 직업생활에 있어서 더 그렇습니다. 저 또한 그런 상황을 겪었고, 병원에 입원했을 때 매일 우울했던 제가 다시 일을 하면서 활기찬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장애인이 되고나니 살아가는데 돈이 더 많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호화롭게 살기 위해 돈이 많이 필요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직설적으로 말해서 “생존”에 돈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제 친구가 유럽에 가서 화장실을 사용할 때 돈을 받는 것을 겪어보고는 불만을 토로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저는 장애인이 되고 나니까 매일이 유럽입니다. 소변을 볼 때 매일 5-6개 사용하는 도뇨관을 사야했습니다. 아직 유럽을 못 가본 제가 매일 유럽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뿐 아니라, 다른 여러 보조 기기들이 필요했고 사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직업 생활에 상당한 제약을 받으면 어떨까요? 살아가는데 필요한 돈은 많아졌는데 돈을 벌기는 더 어려워졌습니다. 

    “장애인에게 직업이란 돈을 버는 수단을 넘어 자아실현의 목적도 있습니다.”


#장애인식개선교육에 대해 관심을 갖다.

 “저 휠체어 탄 선생님 진료 잘 하시나요?”

 레지던트로 복귀하여 열심히 진료하고 있던 어느 날 우연히 제 귓가에 들려온 음성이었습니다. 치과에 가면 치과의사를 먼저 만나는 경우도 있지만, 진료 의자에 누운 후 치위생사들이 진료 준비를 먼저 하고나서 치과의사를 만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얼굴에 소공포를 덮은 상태에서 치과의사가 진료를 이어가게 됩니다. 이 상황에서는 진료를 다 받고 나가면서 휠체어 탄 저를 보게 됩니다. 이 상황에서는 저는 한 번도 위와 같은 걱정스런 음성과 시선을 느끼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선후 관계가 바뀌었을 때는 휠체어를 탄 치과의사를 먼저 보고 걱정이 될 때가 있나봅니다. 저는 이렇게 선후 관계만 바뀌었을 뿐이었는데 달라지는 인식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부정적인 편견보다는 무지에서 비롯된다.”


#장애와 장애인을 어떻게 대해야하는가

 저는 치과의사가 되기까지 그리고 치과의사가 된 이후 전문의가 되기까지 수많은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장애인식개선 교육을 들어본 기억이 없었습니다. 제가 기억을 못하는 것인가? 생각도 해보았지만, 들은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인식의 차이가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보다는 장애와 장애인을 어떻게 대해야할지 모르고 익숙지 않은 것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제가 진료실에서 열심히 진료를 하면서 환자 및 보호자 분들의 장애에 대한 인식 개선을 할 수 있지만, 진료실 밖에서도 사회적 역할을 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찾아보았습니다. 그렇게 저는 한국장애인고용공단과 한국장애인개발원에서 직장 내 및 사회적 장애인식개선교육 전문 강사 자격증을 취득하였습니다. 전문 강사 양성 과정 교육 중에 제가 왜 장애인식개선교육을 들어보지 못하였는지에 대한 해답도 찾았습니다. 7차 교육 과정부터 장애인식개선 교육에 대한 내용들이 교과서에 반영되기 시작하였고 최근 들어 장애인식개선 교육을 의무적으로 실시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지금 치과의사로서 직업 생활에도 최선을 다하고 있고, 장애인식개선 교육전문강사로서 진료실 밖에서도 열심히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세상은 점점 좋아지고 있어!”


#세상은 저절로 나아지지 않는다(The world will not get better on its own).

 영국의 역사학자 Eric Hobsbawm이 한 말입니다. 세상이 저절로 좋아지겠지라고 생각하고 손 놓고 있으면 절대로 세상은 저절로 나아지지 않습니다. 장애인에 대한 인식 그리고 장애인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공지능, 전기차 등 인류가 계속 발전하니까 장애인에 대한 인식도 저절로 좋아지겠지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인식을 바꾸는 일은 매우 힘듭니다. 따라서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저는 이러한 인식을 바꾸는 데 장애인의 직업생활에 대한 제약을 없애는 것이 필요하고, 그 결과로 인식이 바뀌면 제약도 더 없어지는 선순환의 고리가 형성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애인이 제약 없이 일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장애인이 사회구성원으로서 일을 하고 활발히 활동하게 되면 장애와 장애인을 우리 주변에서 친숙하게 접할 수 있게 되고 인식도 개선이 될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인식의 변화가 장애인이 실제로 자유롭게 일하고, 활동할 수 있는 사회 기반 시설의 개선도 유도할 것입니다. 장애인 그리고 비장애인, 우리는 함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정말 행복하게 다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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